아무 것도 연주하지 않은 연주자가 박수 받은 이유

백승찬 선임기자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1일 리사이틀에서 앙코르로 ‘4분 33초’ 연주

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는 다닐 트리포노프. ⓒHyeonkyu Lee·마스트미디어 제공

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는 다닐 트리포노프. ⓒHyeonkyu Lee·마스트미디어 제공

수차례 커튼콜을 받은 연주자가 마침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관객들은 숨죽이고 긴장한 채 앙코르 곡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렀다. 연주자는 여전히 건반 위에 손을 얹지 않았다. 서서히 연주자의 의도와 곡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일 저녁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다닐 트리포노프가 연주한 앙코르 곡은 ‘4분 33초’였다. 미국의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의 곡으로 1952년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가 미국 뉴욕 매버릭 콘서트홀에서 초연했다. 사실 이 곡은 ‘곡’이라 부르기 애매하다. 4분 33초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는 곡이기 때문이다. 3악장으로 구성돼 있지만 시간을 재지 않는 이상 관객이 악장을 구분하긴 어렵다.

존 케이지는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정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4분 33초’를 작곡했다고 한다. 이날 트리포노프의 연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관람 매너 좋은 공연장이라도 완벽한 정적이 성립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곡은 관객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내는 소리와 함께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날 연주 도중에도 곳곳에서 관객의 기침 소리, 팸플릿 떨어뜨리는 소리, 스마트폰 소리가 들렸다. 한 관객이 ‘러브 유(Love you)’라고 외쳐 가벼운 웃음이 번져 나가기도 했다. 2023년 KBS 교향악단이 ‘4분 33초’를 연주했을 때 관객은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박수, 휘파람이 나왔고 4분 33초가 다 되어 가자 함께 카운트다운을 하기도 했다.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러시아에서 온 기인’ 같은 풍모를 보인 트리포노프는 스마트폰으로 4분 33초를 잰 뒤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에게 인사했다. 관객들은 열렬한 박수로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은 연주자에게 찬사를 보냈다. 트리포노프가 이 곡을 앙코르로 연주한 이유는 이날의 프로그램과 관련 있다. 이날 프로그램은 알반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 1번’(1907~1908)으로 시작해 존 코릴리아노의 ‘오스티나토에 의한 환상곡’(1985)으로 끝나는 20세기 곡들로 짜였다. 대형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인기 피아니스트의 공연 선곡으로는 도전적인 구성이다. 작곡 시기와 성향이 다른 작곡가 9명의 곡들로 구성됐지만, 트리포노프는 마치 한 곡의 다른 악장이라도 되는 듯 곡 사이 간격을 크게 두지 않고 이어서 연주했다. 트리포노프는 피아노의 타악기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듯 때로 강력하게 건반을 때렸다. 어떤 곡은 전자음악처럼 같은 음이 장시간 반복되기도 했다. 물론 올리비에 메시앙의 ‘아기 예수의 입맞춤’이나 존 애덤스의 ‘차이나 게이트’처럼 비교적 서정적인 곡도 있었다.

트리포노프는 사전 인터뷰에서 이날 선곡에 대해 “한 세기 동안 각각의 다른 작곡가들이 피아노라는 악기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치 그 이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에 중점을 뒀다”며 “나 자신에 대한 실험”이라고 말했다. 음악평론가 허명현씨는 앙코르 곡을 두고 “오늘 리사이틀을 의미 있게 끝내기에 완벽한 선곡이었다”며 “야심차고 가차없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적으로도 아주 다채롭다. 멜로디의 시대가 끝나고 20세기 작곡가들이 내놓은 영감을 무대 위로 옮겼다”고 평했다.

트리포노프는 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선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2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등 좀 더 익숙하고 전통적인 레파토리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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