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읽고 전시회 초대권 받자!

4년 만에 돌아온 정호승, 절망의 역설…희망, 그리고 용서

심혜리 기자

열두 번째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를 출간한 정호승 시인이 지난 10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이 시대의 용서와 절망,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를 출간한 정호승 시인이 지난 10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이 시대의 용서와 절망,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정호승(67)이 ‘절망’의 역설을 품고 돌아왔다.

시인이 4년 만에 출간한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에서 그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고 말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중)

“희망은 무섭다/ 희망이 있어도 희망은 무섭다 (…) 절망은 희망을 딛고 서 있지만/ 희망은 무엇을 딛고 서 있는가.”(‘희망의 밤길’ 중)

13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호승 시인은 “희망의 구체성이 중요하다”며 “그동안 우리는 절망에서 헤어나려고 애썼지만, 희망은 절망에 철저히 뿌리내리고 바탕을 두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가치”라고 말했다.

시인은 희망을 갖기 위해 역설적으로 무너져 내리라고 말한다. “누구나 무너져 내리지 않으면/ 탑이 되지 못한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 폐사지가 되지 못하면/ 야탑 하나 세우지 못한다.”(‘야탑(野塔)’ 중) 이러한 역설은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 “슬픔의 힘”을 역설했던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창비·1979)부터 일관된 그의 시적 정서다.

가톨릭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모든 종교를 품어내는 정호승은 절박한 보통 사람들이 붙들 수 있는 위로를 들려준다. “소유는 나를 부러워하느라 잠을 못 자고/ 무소유는 나를 질책하느라 밤을 새운다”(‘무소유에 대한 명상’ 중)는 고백을 하기도 하고, “수도원 가는 길에 나는 십자가를 버린다”(‘수도원 가는 길’ 중)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중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용서’다. 시집에서 정호승은 용서를 반복해서 묵상한다. ‘용서’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새들에게 한 질문’, ‘성흔’, ‘침묵 속에서’, ‘이별을 위하여’, ‘용서의 계절’ 등 10여편의 시에서 그는 “산다는 것 자체가 용서한다는 것”이라는 명제를 곱씹는다.

그가 용서를 얘기하는 이유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용서를 하기 어려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용서가 참 어렵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용서로 완성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그 사실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용서를 얘기하게 됐어요.”

천주교 신자지만, ‘사형제도 폐지 촉구’ 세미나의 패널로 초청됐을 때 그는 끝내 세미나에 가지 못했다. “저는 아직도 정리가 안돼요. 용서의 문제라는 게.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혹은 나의 가족이 피해를 입었을 때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완벽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은 계속 생각하고 추구해야 하는 거죠.”

시인의 용서와 희망, 사랑은 아름답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평론가 염무웅은 시집의 해설에서 “종교적 간구와 시적 추구가 겸손의 마음 안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면서도 “예의 바른 사람과 오래 마주 앉아 있을 때 느끼는 불편함 같은 것”이 시에 있었다고도 고백한다. 염 평론가는 “정호승의 시에서는 좀처럼 정호승의 민낯을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정호승은 이에 대해 “제 시적 기질이 그렇다”며 “저는 감춤으로써 완성하려고 하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저 자신을 많이 드러내지 못할 것 같다”고 답했다.

정호승은 최근 논란이 됐던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해선 “유구무언”이라고 일축했다. 침묵하던 그는 “문학은 그러한 논란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것에 대한 결정체로 남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그 또한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다.

등단 44년. 그는 “누구나 어떤 소중한 것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데, 저는 그것이 시”라며 “40여년 동안 시를 쓸 수 있게 해준 시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시인은 또 “만약 시를 몰랐다면, 내 삶은 너무 쓸쓸하고 황폐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Today`s HOT
정부 원주민 정책 비판하는 뉴질랜드 시위대 타히티에서 서핑 연습하는 서퍼들 뉴욕 법원 밖 트럼프 지지자들 중국-아랍국가 협력포럼 개최
abcd, 스펠링 비 대회 셰인바움 후보 유세장에 모인 인파
의회개혁법 통과 항의하는 대만 여당 지지자들 주식인 양파 선별하는 인도 농부들
남아공 총선 시작 살인적 더위의 인도 이스라엘 규탄하는 멕시코 시위대 치솟는 아이슬란드 용암 분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