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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쿠바인에게 ‘문화’란…불안·갈등 녹여내는 꿈의 용광로였다

아바나(쿠바) | 글·사진 김향미 기자

① 쿠바 - 우리의 몸속엔 흥이 흐른다

“어려서부터 노래·춤 생활화하니 개인과 공동체 삶에 활기”

쿠바 아바나 세로 지역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마리오 베네디 주니어(왼쪽)의 가족이 음악과 춤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베네디 주니어가 노래를 부르자 그의 어머니 시오 마라 가르시아, 이웃집 아이 미아 알레한드라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쿠바 아바나 세로 지역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마리오 베네디 주니어(왼쪽)의 가족이 음악과 춤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베네디 주니어가 노래를 부르자 그의 어머니 시오 마라 가르시아, 이웃집 아이 미아 알레한드라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문화는 삶의 자산이자 공동체의 미래다. 오랜 시간의 축적을 통해 그 공동체에 새겨지는 사회적 유전자다. 돈이 있어야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호흡하는 공기이자 몸속을 흐르는 피다. 우리는 그런 삶의 현장을 쿠바 사람들을 통해 마주할 수 있었다. 19세기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파리, 20세기엔 그 주인공이 뉴욕이었다면 21세기는 베를린이 됐다. 전쟁과 분단, 냉전의 상징이던 메마른 도시에서 가장 ‘힙’한 도시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들과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이 도시는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한때 세계를 누볐던 영국은 독서교육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 케냐의 슬럼가 아이들은 음악으로 희망을 만들어간다. 문화는 때론 정치와 군사력이 끌어내지 못하는 성취를 이끌어낸다. 경향신문은 세계 곳곳의 생생한 문화 현장을 찾아가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와 미래를 설계하는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전한다.

[문화,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다](1)쿠바인에게 ‘문화’란…불안·갈등 녹여내는 꿈의 용광로였다

쿠바 아바나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 안. 승객들이 짐을 챙기기 시작할 무렵, 스피커에선 안내방송을 마친 기장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남미 특유의 리듬감이 돋보이는 노래였다. 기내에서 기장이 마이크를 들고 부르는 노래라…. 생경한 상황에 절로 웃음이 나며 경계심이 느슨해진다. 누구나의 버킷리스트에 있을 만한 도시 아바나. 사회주의 체제로 인한 고립과 가난은 역설적으로 이곳을 자본주의 세계의 때가 묻지 않은 낭만과 환상적 풍광을 가진 곳으로 꿈꾸게 만들었다. 그리고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다.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아바나 시내의 번화가인 오비스포 거리의 한 레스토랑에 들렀다. 우리식 트로트와 비슷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레스토랑 주인은 전통음악인 ‘손(Son)’이라고 했다. 여기에 맞춰 살사를 춘다. 닭고기 요리와 맥주 한잔을 시켰다. 옆 테이블에서는 두 여성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은 무언가를 포크에 찍어 입안에 넣으면서도 연신 몸을 흔들어 댔고 맞은편에 앉은 이는 박수를 치면서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몸을 흔들던 여성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싱긋 웃으며 “언젠가는 댄서로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올해 쉰이 넘었다는 그는 “8년 전부터 퇴근한 뒤 매일 밤 늦게까지 살사를 연습한다”고 말했다.

어딜 가나 흐르는 춤과 음악, 푸근한 웃음과 자유로운 유쾌함이 볼을 간지럽히는 도시 아바나. 이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춤과 노래로 소통하는 사람들

쿠바의 6월 날씨는 아바나의 색감을 도드라지게 했다. 강한 햇살이 파스텔톤 건물과 형형색색의 올드카들을 선명하게 비추다가 온도가 절정에 달할 즈음이면 소나기가 내렸다. 그러면 다시 공기가 선명히 맑아졌다. 아바나 서편의 대표적인 상업지역 베다도. 이곳의 랜드마크인 ‘아바나 리브레’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10분쯤 달렸을까. 아스팔트 도로가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도착한 곳은 세로(Cerro) 지역의 한 아파트다. 아바나는 서울의 ‘구’에 해당하는 15개의 지자체로 구성돼 있다. 세로는 그중 하나다.

“올라(Hola)!” 마리오 베네디 주니어(38)의 집에 들어서자, 베네디 가족들은 반갑게 포옹하며 인사했다.

베네디 주니어는 응급의사인 부인 앙네리스 베르난데스(33)와 함께 살고 있다. 마침 일요일이라 베네디 주니어의 아버지 마리오 베네디(70)와 어머니 시오 마라 가르시아(67)도 함께 있었다. 치과의사이자 가수인 베네디 주니어의 집은 20평(약 66㎡) 규모의 아파트다. 방 2개, 거실, 부엌, 화장실 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쿠바의 서민 가정이 사는 집’이다. 거실 한쪽에 놓인 커다란 오디오와 벽에 걸린 그림들을 훑어보는데 베네디 주니어가 손수 커피를 내왔다.

조금 있으니 대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들어와 소파 한쪽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베네디 주니어의 딸인 줄 알았더니 옆집에 사는 미아 알레한드라다. 그러고 보니 집의 현관문은 처음부터 죽 열려 있었다. 가르시아가 웃으며 설명했다. “쿠바에선 다들 이렇게 문을 열어 놓아요. 옆집과도 가족처럼 지내니까요. 누군가 길을 물어봐도 모른다고 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걸요.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서 있다가도 금세 친해져서 같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하니까요.”

베네디 주니어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에는 진료를 하고 오후엔 작곡 공부와 노래 연습을 한다. 저녁시간엔 가수로도 활동한다. 세로에 있는 ‘카사 데 쿨투라’(문화의 집)나 박물관 등에서 공연을 한다. 그에게 노래는 취미가 아닌 직업이다. 은퇴한 그의 부모는 아들의 공연을 찾아다니는 게 주요한 일과다. 그가 일어나서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자, 가르시아와 알레한드라가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알레한드라는 “춤학교에서 배운 ‘메렝게’라는 춤”이라고 또박또박 설명했다. 춤에 대한 답례로 한국민화가 그려진 수첩을 건네자 알레한드라는 자신이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려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쿠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플라멩코에서 살사까지 다양한 춤들을 춥니다. 카리브해 민족들은 흥을 타고났어요. 노래나 춤 어느 하나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오죽하면 동전 굴러가는 소리에도 춤을 춘다는 속담이 있으니까요.” 베네디 주니어의 설명이다.

베네디 가족뿐만이 아니다. 아바나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쿠바인의 몸에 남다른 피가 흐른다”고 말했다. 센트럴 광장에서 만난 밴드를 하는 대학생 레네 페르츠(26)는 “어려서부터 가족들 몇 명만 모여도 할아버지의 기타에 맞춰 자연스러운 음악회가 열렸다”면서 “그런 느낌이나 경험은 지금의 내 삶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관광가이드를 하는 리세테 곤살레스(28)도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서 ‘살사를 잘 춰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면서 “오빠랑 매일 연습하곤 했다”고 설명했다.‘쿠바인의 남다른 피’는 어디서, 어떻게 나온 걸까. 차로 시내 중심부 혁명광장을 지나는 길에 나타난 동상을 가리키며 곤살레스가 말했다. “호세 마르티 동상이에요. 쿠바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존경받는 민족 영웅이죠. 우리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그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문화라고 했어요.”

구스타보 아르코스 쿠바예술대학(ISA·Instituto Superior de Artes) 교수(52)를 만난 자리에서 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인구 1120만명이 사는 작은 섬에서 얼마나 많은 예술가가 나왔는가를 따져보면 이 섬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적 자원입니다. 쿠바는 혁명 이전이나 혁명 이후나 인간의 문화적 역량을 키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죠. 자유로운 인간의 존재, 그 자유는 문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쿠바 아바나 중앙역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레헨다리오스 델 과히리토’(Legendarios del Guajirito). 관광객들 사이에 명소로 알려진 이 레스토랑 무대에서 연주자들이 쿠바 전통 음악 공연을 펼치고 있다.

쿠바 아바나 중앙역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레헨다리오스 델 과히리토’(Legendarios del Guajirito). 관광객들 사이에 명소로 알려진 이 레스토랑 무대에서 연주자들이 쿠바 전통 음악 공연을 펼치고 있다.

■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예술

‘문화생활=돈’. 우리가 일상에서 문화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편견이다. 베네디 주니어 가정의 월평균 소득은 2000쿠바페소(쿱·CUP). 한화로 9만4000원가량이다. 한국 기준으론 형편없는 소득인 것 같지만, 이곳에선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다. 무상교육·무상의료 등으로 사회 서비스에 대한 비용은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넉넉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들에게 문화생활이 일상이 되는 것은 대부분 무료이거나 무료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 관람료는 2~5쿱(90~230원)으로 즐겨 먹는 빵(5쿱가량)보다 싸다.

아르코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쿠바에는 문화에 관한 통계가 없다. 관객 동원수나 관람료 수입과 같은 집계를 할 필요도, 방법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전공한 아르코스 교수는 “단지 산업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영화 상영 장비나 제작 장비가 노후화되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대중들의 접근성은 어느 나라보다 잘 갖춰져 있다”고 강조했다. 체제 유지를 위해 문화를 수단화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아르코스 교수는 “혁명 정부의 문화 정책은 예술에서 개인의 가능성을 키운다는 철학에서 시작됐다”면서 “혁명 이전에도 쿠바에선 댄스나 음악, 문학이 발달해 있었다. 혁명 정부는 카리브해 사람들의 문화적 기질을 잘 살릴 수 있는 구조와 시스템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비평가 고길섶은 2007년 계간지 ‘문화예술’에 기고한 글에서 “쿠바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체제와 사람들의 일상 생활문화가 서로 다르게 평행선을 달린다. ‘사회주의적 삶’을 일상 생활문화로 강제하지 않는다”고 썼다.

아바나 거리 어디서나 예술가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관광객이 많이 찾는 오비스포 거리의 웬만한 식당에는 아티스트를 위한 무대가 마련돼 있다. 물론 그 무대 위에는 흥이 돋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올라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일종의 열린 무대인 셈이다.

동네의 작은 광장에서도 즉석에서 음악회가 열린다. 쿠바 사람들은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룬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누군가 기타를 치고 있노라면 금세 어디선가 플루트, 아코디언은 물론이고 마라카스(maracas)까지 나타나 화음을 맞춘다. 마라카스는 쿠바의 전통악기다.

최근 아바나 젊은이들 사이에 ‘핫플레이스’로 통하는 아트팩토리 내부 모습.

최근 아바나 젊은이들 사이에 ‘핫플레이스’로 통하는 아트팩토리 내부 모습.

■ 카사 데 쿨투라와 아트팩토리

1959년 혁명 정부는 ‘인간다움의 실현’을 위한 문화정책을 폈다. 그 결과물이 ‘카사 데 쿨투라’다. 이는 1978년부터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각 지역에 뿌리내렸다. 전국에 327개. 아바나에는 13개가 있다. 이는 아마추어 예술가 운동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 형성에도 기여했다. 카사 데 쿨투라에서는 누구나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무료로 배울 수 있다. 여기서 실력을 키워 전문화된 예술학교로 진학한다.

아바나 북부에 자리한 ‘혁명광장 카사 데 쿨투라’는 가장 오래된 곳이다. 정책이 공식화되기 전인 1977년 문을 열어 올해 개관 40주년을 맞았다. 입구에서 만난 오스멜 데데스(30)는 열여섯 살 무렵부터 이곳에 다니면서 노래를 배워 가수가 됐다고 했다. 최근 6년 동안은 유명 작곡가의 노래 공연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일주일에 2번씩 이곳을 찾는다. “카사 데 쿨투라가 없었으면 가수가 되지도 못했고 유명한 노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도 없었을 거예요.”

연중 무휴로 운영되는 이곳에는 하루 평균 200명 안팎의 주민이 찾아온다. 그림, 연극, 노래, 춤 등 장르별로 예술을 배울 수 있는 워크숍이 열린다. 그리고 배운 것을 발표하고 나눌 수 있다. 전문 강사진은 24명이며 관리 직원까지 포함하면 60여명이 일하고 있다.

이르마 하네 이사장은 “이곳의 목표는 문화적인 소양을 갖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라며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기초 문화를 접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노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고령 인구가 부쩍 증가한 쿠바(인구의 19.8%가 60세 이상)에서 문화생활 수요는 더 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미디어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요스바니 데야는 “쿠바인들은 카사 데 쿨투라가 쿠바 문화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곳을 방문한 날 오후 4시에도 노래공연이 열렸다. 쿠바인들의 평균 퇴근 시간이 오후 4시반 정도이고 오전만 근무하는 사람들도 많아 오후 4시 공연은 일상적인 것이다. 100여명의 관객이 채우고 있는 공연장은 시끌시끌했다. 서로 반갑게 포옹하며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쿠바에서 해외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아트팩토리다. 아바나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곳이다.

아트팩토리는 쿠바 음악가 에키스 알폰소가 추진한 문화 프로젝트로, 2014년 과거 기름공장을 개조해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아바나의 현재를 보려면 아트팩토리에 가야 한다”는 현지인들의 추천에 따라 아트팩토리를 찾은 시간은 오후 9시였다. 이곳은 아바나의 밤을 깨우는 공간이다. 보통 오후 8시부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문을 여는데 하루 2500명이 넘게 찾는다. 도착하자 이미 몰려든 인파로 100m가량의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입장료는 약 2200원 정도로 상당히 비싼 편이다. 이 때문에 쿠바에서도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관광업에 종사하거나 고소득층이 주로 이용한다.

아트팩토리는 2층 구조의 건물로, 5개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영상물을 상영하는 곳에서는 비틀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과 찰리 채플린의 흑백 영상이 스크린에 투사되고 있었다.

공연장에서는 한 캐나다 뮤지션의 라이브 공연이 한창이었다. 쿠바 사진가와 프랑스 화가의 컬래버레이션 전시회에도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이곳에서 만난 아나 카를라 가르시아(24·엔지니어)는 문화생활을 위해 주말마다 20쿡(약 2만2000원)가량을 쓴다고 했다. “상당히 많은 돈을 쓰는 것”이라는 그의 말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주말마다 아트팩토리를 찾는다는 마리칼라 멘데스(19·무직)는 한국 드라마와 K팝을 즐긴다고 했다. 아트팩토리를 나선 시간은 밤 11시. 입구에는 여전히 들어올 때와 비슷한 정도로 줄이 늘어서 있었다.

아바나 관광지인 오비스포 거리에서 행위예술을 펼치고 있는 ‘더 모스트 원티드’.

아바나 관광지인 오비스포 거리에서 행위예술을 펼치고 있는 ‘더 모스트 원티드’.

■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누구나 예술을 즐기고 나누는 나라. 이곳에서 직업 예술가들의 삶은 어떨까.

오비스포 거리의 ‘라 마도니아’란 식당에서 4인조 아티스트 그룹 모자이크를 만났다. 10개의 테이블에는 관광객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음악은 쿠바 전통음악과 대중가요가 반쯤 섞여 있었다. 이들은 6년 전 음악학원에서 만나 그룹을 꾸렸다고 했다. 보컬인 마를렌 푸엔트데(51)는 “다양한 인종과 나이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소개했다. “저는 25살 때부터 가수로 활동했어요. 춤도 전문적으로 추죠. 하루 5~6시간씩 공연하면서 살아요. 쿠바의 예술가들은 하나만 하지는 않아요. 노래하면서 춤을 추고, 악기도 다루죠.”

모자이크 그룹은 식당에 고용된 게 아니기에 손님들에게 음반(CD)을 팔아 수익을 얻는다. 이 그룹의 앨범 가격은 10쿡(CUC·약 1만1300원)이었다. 쿠바에는 2가지 화폐단위가 있다. 내국인 전용인 쿱과 외국인 전용인 쿡이다. 1쿡은 1달러 정도 된다. 내국인 화폐 24쿱이 1쿡에 해당한다. 오비스포 거리 특성상 주로 관광객이 손님이라서 식당 음식 가격이나 음반 가격도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화폐인 쿡에 맞춰져 있다. 물론 물가도 비싼 편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전한 나라들과는 달리 쿠바에선 예술가가 고소득을 올리는 사례가 많지 않다. 아바나의 소극장 ‘루디 시어터’에서 극장 운영자이자 극단을 이끄는 미겔 아브레우 감독(42)을 만났다. 쿠바예술대학(ISA) 출신인 그는 2014년 극단을 창단해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지난해 극장 문을 열었다. 극장 안에선 7월 공연을 위해 연습이 한창이었다. 하루 5시간씩 연습한다고 했다. 이전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때 하루 평균 70명의 관객이 찾아왔다.

아브레우 감독 개인 차원에서 문을 열었지만 극장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감독이나 배우나 아바나연극센터에서 월 3만원이 채 안되는 급여를 받는다. 그는 미술관 큐레이터라는 제2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소득이 많은 편이 아니죠. 보통 다른 일도 같이해야 합니다. 연극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 이 일을 계속하는 거예요.” 어려서부터 배우가 꿈이었다는 아브레우는 카사 데 쿨투라에서 연극을 배우기 시작했다. 쿠바에서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도 인기가 많지만, 연극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연극은 살아있는 예술이다. 다른 작품은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지만 연극은 그 순간 배우랑 관객이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라면서 “쿠바는 연극 교육이 잘돼 있어서 어느 나라보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비스포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행위예술가 ‘더 모스트 원티드’(35·활동명)는 조각상처럼 분장을 한 뒤 건물 벽에 몇 시간이고 기대 서 있다. 하루 동안 짧게는 6시간, 길게는 14시간까지도 서 있을 때가 있다. 의상과 분장은 은행강도를 묘사한 것이다. 그도 쿠바예술대학(ISA)에서 연극과 그림을 배웠다. 덕분에 의상 제작이나 분장을 직접 한다. 분장하는 데만 1~2시간이 걸린다.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보는 게 많아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감탄하고 신기해합니다. 반대로 저는 예술가로서 그들에게서 감동을 받고 새로운 경험을 얻지요. 제품을 파는 것처럼 예술은 가격이 매겨져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마다 다른 것을 지불하죠. 방금 전 어떤 여성은 초콜릿 한 조각을 주고 갔습니다.”

산호세 공예시장에서 만난 화가 후안 마누엘 데데스(53)는 40년간 그림을 그렸다. 앤디 워홀에게서 영감을 받아 깡통 이미지를 소재로 한 팝아트 작품을 주로 전시·판매하고 있다. ‘쿠바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가’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변했다.

“쿠바의 화가들은 예쁜 이미지만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죠.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화가의 일이니까요.”

■ 세계 속 쿠바 문화, 쿠바 속 세계 문화

쿠바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400만명의 관광객이 쿠바를 찾았다. 2003년 190만명 수준이던 관광객 수는 꾸준히 증가하다가 2015년 미국인들의 자유여행이 가능해지면서 최근 그 수가 급증했다.

세계인들의 뇌리에 쿠바는 몇몇 이미지를 남긴다. 젊은 혁명가 체 게바라의 꿈이 실현된 나라이자 <노인과 바다>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예술 분야에서도 걸출한 스타들을 낳았다. 문학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노래한 호세 마르티, 회화에서는 모더니즘 화가인 아멜리아 펠라에스, 영화에서는 <저개발의 기억>(1968) 감독으로 유명한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 음악에서는 ‘누에바 트로바’ 운동의 기수인 실비오 로드리게스. 20세기 전반과 후반을 각각 풍미한 재즈와 살사도 쿠바를 모태로 세계 속으로 확산됐다.

국내에서 쿠바문학 권위자로 꼽히는 신정환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논문 ‘쿠바문화의 기원과 쿠바 문학’에서 “쿠바문화는 풍부한 민중정서적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되 그것의 형성과정을 보면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공존이 그 기반이 돼 왔다. 문화적 관용성이야말로 ‘쿠바성’의 핵심”이라고 썼다.

문화에 대한 관심과 욕망, 개방성은 쿠바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현재 쿠바에서는 인터넷이 특정 장소에서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제한돼 있다. 외부문화의 접촉이 어려울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파게테’(패키지)라는 문화 정보통이 확산돼 있다. 이는 일종의 외장하드다. 익명의 제작자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드라마, 춤, 음악 등 각종 정보를 담아 놓은 것이다. 일요일에 나온 최신판은 5쿡, 월요일에 받아보면 4쿡, 화요일에 받아보면 3쿡으로 가격이 매겨진다. 쿠바 정부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가장 효과적인 문화배급 통로가 된 셈이다.

정부가 장려하는 문화는 보통 TV나 라디오를 통해 향유되는데, 그러한 매스미디어 시스템 밖에 있는 ‘레게톤’이라는 음악 장르가 요즘 쿠바에선 가장 잘나가는 장르다. 레게톤 장르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고가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이 장르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은 많은 수입을 얻고 경호원을 고용하는 등 자본주의 체제의 스타시스템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 쿠바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문화를 중심으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쿠바에선 외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업이 활기를 띠면서 쿠바 고유의 문화를 활용한 관광상품이 늘어나고 있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모티브로 한 공연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저녁식사 비용을 포함해 1인 입장료가 60쿡(6만7800원)에 이르는 값비싼 프로그램도 있다. 전통음악과 쇼를 결합한 형태.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있는 데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평화로운 쿠바의 문화향유 체계를 손상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구스타보 교수는 “현재 쿠바 정부와 문화·지식인들은 상당히 어려운 숙제를 끌어안고 있다”면서 “어떻게 해야 문화가 관광에 편입되지 않을지, 관광객을 유치하면서도 쿠바의 순수문화를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박경은·박은경·심혜리·정원식·김향미·김형규·김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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