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두 임금이 있습니다. 광해군과 인조입니다. 역사서는 광해군을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이른바 ‘폐모살제’의 오욕을 뒤집어쓴 폭군으로 폄훼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조는 ‘어지러움’을 ‘바름’으로 바꿔놓은 ‘반정’의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정세력이 공표한 인조반정의 명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광해군의 외교실정입니다. 반정세력은 이른바 혁명공약에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재조지은·再造之恩) 명나라에 배은망덕 했고, 사태를 관망하며 정책을 결정하는 외교(관형향배)로 오랑캐(후금)에 투항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명나라를 배반하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외교행위’라고 천명했습니다. 이렇게 공표해놓으니 더는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절묘한 줄다리기 외교를 나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를 ‘금수의 외교’라 비난하며 등장한 반정세력은 어땠을까요.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향한 ‘닥치고 충성’의 대가는 어떠했습니까. 이괄의 난(1624년)을 필두로,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 세 번의 전란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습니다. 무려 60만명의 백성들이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정묘·병자호란의 와중에 내심 화친을 바라는 신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화친을 논하는 순간 ‘오랑캐 세력’으로 낙인찍는 풍토 때문에 입도 벙긋 못했답니다. 걸핏하면 ‘종북파’니 ‘빨갱이’니 하며 색깔을 칠하는 작금의 풍토와 다를 바 없습니다. 병자호란이 치욕적인 항복 선언으로 끝난 뒤 무능한 군주 인조가 한강을 건너 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연도에 늘어선 1만여 백성들이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임금이시여. 백성을 버리십니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5회’는 ‘인조의 닥치고 외교와 광해군의 관형향배 외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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