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집’의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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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집’의 두 번째 이야기

    

지난주에 이은 <등나무 집>의 두 번째 이야기다. 527쪽의 책 속에 담긴 내용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구구절절 우리 민족의 아픔이기도 했다. <등나무 집>을 쓴 성혜랑(89) 작가에 대해서 소개한다.

성혜랑은 북한 최고의 권력자였던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김정남의 母/영화배우)의 언니다. 또한, 의문의 피격으로 생을 마감한 故이일남(이한영)과 전 세계의 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은 김정일의 수양딸 이남옥의 어머니다. 1996년 북한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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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김정남/ 앞 줄 오른쪽이 소년 시절 김정남, 뒷줄 왼쪽이 성혜랑 작가-출처: 야후재팬)

잊을 수 없는 등나무 집...하왕십리 46번지

성혜랑은 1935년 서울 계동의 고전적 주택에서 태어났다. 두 살 위인 오빠 ‘성일기’가 있고, 연년생으로 동생 ‘성혜림’이 있다. 계동에서 왕십리로 이사를 갔다. 책에 담긴 왕십리 등나무 집(하왕십리 46번지)의 분위기다.

<아버지는 거침없이 온 식구를 끌고 이사를 갔다. 우리가 간 집은 진흙에 볏짚을 섞은 토담으로 벽을 세우고, 지붕은 검은 함석을 눌러쓴 집이었다. 일본 농군이 아무렇게나 지은 작품이었다...그러나 왕십리는 우리 삼남매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고장이다.>

“얘들아 밥 먹어라!”

<엄마가 부르는 소리, 등나무 아래서 서양식으로 접시에 밥을 담고, 카레를 퍼 담아 주던 엄마의 앞치마 두른 모습, 도넛을 튀겨 수북이 담아놓았던 찬장, 달고 고소한 기름내가 안기던 행복...극히 드물게 엄마가 피아노 치던 3박자의 탄력에 풀려나오던 애조를 나는 귀 기울이고 가만히 듣곤 했다.>

작가의 등나무 집 추억 중 잊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바로 ‘달밤이다’. 달밤과 등나무에 대한 묘사가 남다르다.

<어느 가을날. 밖에는 달이 대낮같이 밝은데 응접실 유리문에 무엇이 짱짱 와서 쫓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등꽃 씨앗 길쭉한 콩 열매가 짜개지면서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어떻게 날아올까? 정신없이 지켜보노라니 그것은 콩깍지가 파열하면서 내는 힘이었다.>

“어머나, 어쩌면...”

<높은 덕대 위에 떠받들린 호화한 꽃들이 남긴, 그 밤의 내밀한 파열은 내 마음에 신비한 자연의 비밀을 엿본 듯한 감명을 주었다. 그러고 보면 비틀어 터질 듯이 감겨 올라 간 등나무 줄기의 고뇌는 상서롭지 않다. 그 아픔을 송이송이 흐트러진 자유분방한 연보라 알알이 어찌 감당할쏘냐. 그때 쪼개지며 날아와 창을 두드리던 고뇌의 하소연을 듣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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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꽃의 이미지)

등나무는 난·온대 상록활엽수림에 서식하는 나무다. 특히 밝은 빛과 따뜻한 입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음습하거나 냉습한 기간이 긴 지역에는 분포하지 않는다.

등나무를 통해서 우리가 흔히 쓰는 갈등(葛藤)이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을 생각하면서다.

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대립과 모순으로 뒤엉켜 버린 상황을 말한다. 갈등(葛藤)의 갈(葛)은 칡을 의미하며, 등(藤)은 등나무를 의미한다. 칡은 왼쪽(twined leftward)으로 감고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twined rightward)으로 감고 올라간다고 여긴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두 종(種)이 함께 얽히듯이, ‘이해관계가 뒤엉켜버린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실제는 다르다. 등나무는 오른쪽, 왼쪽을 가리지 않고 양쪽을 감고 올라간다. 어쩌면 인간보다 더 현명한 듯싶다(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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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줄기의 이미지)

공산당원이 된 부모...무엇이 그들을 유혹했을까.

성혜랑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다. 우리 민족은 36년간의 가혹한 일제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됐으나 해방의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남북으로 갈라졌다.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했다. 우익과 좌익의 대립에서 진보를 갈망하고, 애국의 길을 찾던 성혜랑의 부모는 1945년 12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조선의 손꼽히는 양반 창녕 성(成)씨, 대지주의 후손이던 아버지가 공산당에 들어가고 대대로 물려오던 적지 않은 땅을 전부 소작인에게 나눠줘 버린다. 또한, 전 재산을 털어 공산당에 바친다. 이에 대해 친척들은 물론, 그를 아는 우익친구들이 놀라움과 비난의 목소리를 터뜨린다.

어머니 김원주는 누구인가.

<20년대 동시대인들 속에 알려졌던 우리 어머니가 좌익에 갔다고 모모한 여류들이 한탄을 넘어 아무개가 미쳤다고 소문을 냈다. 모윤숙, 황신덕, 박순천...그들은 나의 어머니를 아끼던 선배들이었다.>

<우익 정계의 옛날 지인들은 나의 부모가 ‘그러다 말려니’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는 최대급행, 좌우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방사각을 달리고 있었다.>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부모와 자식, 형제간이 원수가 되고, 앞뒷집이, 온 민족이, 둘로 맞서는 대열 편성이 이뤄지던 때였다.

등나무 집은 남북 대립의 마지막 비극

<해방 후 우리가 다시 살게 된 하왕십리 46번지는 공산당 간부들의 아지트였고 피신처였다. 오가는 그 많은 동지들을 먹이고 재우고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입히던 우리 부모의 그 헌신적인 열성은, 지난 세월 안일하고 유복하게 살았던 자신들의 과거를 이런 식으로 세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혜랑 작가는 글을 통해서 말한다. ‘책을 쓰는 전 과정에서 체험했던 분단의 아픔은 곧, 아들에 대한 아픔이었고, 등나무집의 비극은 남북대립의 마지막 비화가 아닌가 싶다’라고. 

성혜랑 작가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피력한 말이다.

“다 잊자, 지나간 일을. 화해와 통일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원한을 푸는 것이 미움을 버리는 것이, 지금 남북 겨레의 과제임을 누구보다 나는 더 실감하고 있다.”

“정이 많고 근면하고 인심 좋은 우리 겨레. 지난날을 옛말하며 왕래하는 날이 곧 올 것 같구나. 그러면 나도 내 나라에 가리라. 한평생 그렇게도 그립던 내 고향, 서울 등나무 집에도, 나의 청춘을 노래해준 대동강에도 찾아가리라. 잊을 수 없는 그 좋은 동무들도 다시 만나리.”

작가의 말처럼 우리 겨레는 정이 많고, 근면하며, 인심이 좋은 민족이다. 하지만, 둘로 갈라진 남북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있다. 남북이 왕래하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요원(遙遠)해 보인다. 안타깝게도.

(※참고 및 발췌: ‘등나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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